원제 : The Sense of Style
저자 : 스티븐 핑커 (Steven Pinker)
장르 : 글쓰기, 언어학, 인문교양

들어가며: 인지과학자가 쓴 글쓰기 지침서


요즘 들어 '글을 잘 쓰는 법'에 대한 고민이 많아지면서 서점의 글쓰기 코너만 유독 오래 붙들고 있게 되더라고요. 그날도 어김없이 그 코너 책꽂이에서 우연히 '글쓰기의 감각'이라는 책을 집어 들었어요. 저자 이름이 스티븐 핑커, 하버드 대학교 심리학과에서 인지와 언어를 연구하는 학자였는데, 그가 글쓰기 지침서를 썼다니 너무 궁금했거든요. 원제는 The Sense of Style. 과학자의 시선으로 본 글쓰기가 도대체 어떤 내용일지, 기대되면서도 반신반의했어요.

실제로 이 책의 원서는 2014년에 출간돼 이코노미스트의 2014 올해의 책아마존이 선정한 2014년 최고의 책 목록에 포함되기도 했어요. 인지과학과 언어학의 최신 연구를 글쓰기에 끌어들인 첫 시도라서, 기존의 어법 지침서들과는 전혀 다른 결의 책이었죠. 2024년 김명남 선생님의 번역으로 사이언스북스에서 《글쓰기의 감각: 21세기 지성인들을 위한 영어 글쓰기의 정석》이라는 제목의 한국어판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이건 꼭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못 쓰는 글이 넘치는 이유, 지식의 저주


책은 이렇게 물어요. 세상에는 왜 이렇게 못 쓴 글이 많을까? 인터넷과 SNS 때문에 언어가 타락한 걸까? 핑커의 답은 의외로 명쾌해요. 나쁜 글쓰기의 가장 큰 원인은 '지식의 저주'라는 거예요. 자기가 아는 것을 독자도 당연히 안다고 착각하고 쓰기 때문에, 독자는 문장 사이를 어떻게 건너가야 할지 모르고 길을 잃는다는 거죠.

예를 들어 전문가가 자기가 만든 도표를 두고 '보시면 아시겠지만...' 하고 넘어간다면, 듣는 사람은 머릿속이 하얘지기 일쑤잖아요. 지식의 저주는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잘 알기 때문에 생기는 병이에요. 그래서 핑커는 '독자의 머릿속으로 옮겨 앉으라'고 조언해요. 아는 것을 잠시 잊고, 처음 보는 사람의 눈으로 다시 바라보라는 거죠. 이 한 문장만으로도 글쓰기의 8할이 달라지는 느낌이었어요.

문장은 세상으로 난 창


핑커는 글쓰기의 이상향으로 '클래식 스타일'을 제시해요. 마치 글을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이 같은 방 안에서, 세상으로 난 창을 함께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쓰라는 거예요. 작가가 시야를 가리는 게 아니라, 독자가 창밖의 풍경을 직접 볼 수 있도록 투명해져야 한다는 비유가 너무 와 닿았어요.

이때 중요한 건 화자의 존재감을 지우라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문장 하나하나가 독자에게 '이렇게 보라'고 안내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거죠. 저는 이 책을 읽으며 '아, 이 문장은 왜 이렇게 자연스럽게 읽힐까' 하는 생각을 자주 했어요. 핑커는 그 자연스러움의 비밀이 바로 이 창 너머의 그림을 정확히 보여주는 데 있다고 설명해요.

잘 쓴 글과 못 쓴 글, 그 경계는 어디일까


그럼 도대체 어떤 글이 '잘 쓴 글'일까요? 핑커는 문법 규칙을 외우는 대신, 좋은 글을 실제로 많이 읽어 '귀'를 훈련하라고 강조해요. 문장의 리듬, 단어의 뉘앙스, 구조의 흐름은 결국 몸으로 익

숙해져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책 곳곳에는 좋은 글과 형편없는 글의 실제 사례가 가득하고, 그 문장을 맛보듯 읽는 연습을 시켜줘요.

특히 재밌는 건 나쁜 글의 예시도 실생활에서 건진 생생한 문장이라는 점이에요. '이건 왜 어색하지?'를 과학적으로 파고들다 보면 결국 독자가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기 힘들어서라는 결론에 도달해요. 좋은 문장을 만나면 밑줄을 긋고 두 번 세 번 곱씹게 되는 건, 바로 그 그림이 선명해서라는 생각이 확실히 남았어요.

그물, 나무, 줄 — 문장을 보는 새로운 눈


4장에서는 문장을 '그물, 나무, 줄'에 비유해요. 문장 안에서 단어들이 어떻게 얽히고, 어떤 가지로 뻗어나가고, 어떤 순서로 이어지는지를 그림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영어 중심의 내용이라 건너뛰어도 좋다는 평도 있지만, 저는 문장 구조를 눈으로 '그려' 보는 경험이 한국어 글쓰기에도 큰 도움이 됐어요.

특히 주어와 동사가 멀리 떨어져 있으면 독자가 길을 잃는다는 부분이 인상적이었어요. 글을 쓰고 나면 저도 모르게 수식어를 잔뜩 붙이는데, 핑커는 그게 왜 위험한지 나무 가지를 그리듯 차근차근 보여줘요. 이제는 글을 쓸 때마다 '이 문장을 가지로 그리면 어디가 끊겨 있지?' 하고 점검하게 되더라고요.

일관성의 호, 글이 살아나는 힘


다섯 번째 장의 제목이 참 예뻐요. '일관성의 호'. 한 문장씩은 잘 썼는데도 전체가 산만하게 느껴진다면, 글 전체를 관통하는 '호'가 없기 때문이라고 핑커는 말해요. 처음과 끝, 문단과 문단이 하나의 활처럼 매끄럽게 이어져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핑커는 글을 다 쓴 뒤에 원고를 거꾸로 읽어보라는 실용적인 팁도 알려줘요. 원고 여러 장을 책상에 펼쳐놓고 뒤에서 거슬러 읽으면, 구조가 어긋난 곳이 바로 티가 난다는 거예요. 실제로 이 방법을 써보니 그동안 내 글은 문장은 괜찮은데 '호'가 빠져 있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이 챕터는 영어든 한국어든 모든 언어의 글쓰기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이라 특히 추천해요.

옳고 그름 가리기, 문법 지킴이와의 결별


'수동태를 쓰지 마라', '분사를 어쩌고저쩌고...' 이런 교조적인 규칙, 한 번쯤 들어보셨죠? 핑커는 이런 '문법 지킴이'들의 주장을 과학적으로 가려냅니다. 옛날 어법 지침서에 실린 규칙이 실제로는 근거가 빈약하거나 아예 잘못된 경우가 많다는 거예요.

이 부분에서 핑커의 태도가 참 좋았어요. 규칙을 전면 부정하는 무정부주의자도 아니고, 규칙을 맹신하는 원칙주의자도 아니에요. 독자의 이해를 돕는 규칙은 지키고, 명확성을 해치는 규칙은 버리는 실용주의에 가까웠죠. 옮긴이 선생님이 이 대목에서 "속이 후련했다"고 하셨는데, 저도 읽으면서 속이 확 뚫리는 기분이었어요.

손 닿는 곳에 사전을, 유의어 사전의 힘


책에는 작가를 위한 실용적인 조언도 많이 담겨 있어요.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사전 이야기예요. 작가가 되고 싶다면 손 닿는 곳에 늘 사전을 두고 읽으라는 조언. 특히 핑커는 자신이 늘 유의어 사전을 곁에 두고 쓴다고 고백해요. 같은 뜻이라도 어떤 뉘앙스 차이가 있는지를 아는 것이 곧 문장의 색깔을 만드는 일이라는 거죠.

이 대목을 읽고 저도 바로 책상 위에 유의어 사전을 펼쳐두기 시작했어요. 글을 쓰다 막히는 순간, 사전을 넘겨 단어를 하나씩 찾아보는 시간이 글의 질을 확실히 높여주더라고요.

AI 시대에도 글쓰기의 감각은 필요하다


이 책이 특별한 또 하나의 이유는 AI 시대에 왜 글쓰기를 배워야 하는지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원서가 출간된 2014년에는 이 주제를 직접 다루진 않았지만, 2024년 한국어판의 옮긴이 서문과 홍보 문구는 지금의 AI 시대에 왜 글쓰기 감각이 필요한지를 정면으로 짚어요. 번역과 교정, 요약, 구성까지 기계가 해내는 세상인데, 한국어도 아닌 영어 글쓰기를 왜 배워야 할까?

답은 분명해요. '무엇이 좋은 글인가'라는 기준을 가진 사람만이 기계에게 좋은 글을 쓰도록 지시할 수 있고, 기계가 써낸 글에서 무엇이 부족한지 가려낼 수 있다는 거죠. 옮긴이 선생님은 마지막까지 타인이나 기계에 의존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바로 글쓰기의 감각이라고 짚어요. AI가 쓴 글을 보고 어디가 부족한지 가려낼 수 있는 사람, 좋은 글을 시킬 수 있는 사람이 결국 주도권을 잡는다는 생각이 아주 설득력 있게 다가왔어요. 모니터에 떠 있는 글을 검토하는 순간마다, 그 기준을 내가 얼마나 갖고 있는지 되묻게 되더라고요.

마치며: 글쓰기의 감각, 결국 귀를 믿는 일


솔직한 단점을 말하자면, 문장 구조와 문법을 다루는 4장과 6장은 영어 중심이어서 한국어 독자에게는 다소 어렵고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어요. 옮긴이 선생님도 영어 글쓰기가 목적이 아닌 독자라면 건너뛰어도 좋다고 안내해 주시더라고요. 그래도 중간중간 나오는 보편적인 조언은 꼭 챙겨 읽으시길 권해요.

저녁의 조용한 서재, 책상 램프 아래서 책과 노트를 펼쳐두고 마지막 장을 덮으며 든 생각은 하나였어요. 글쓰기 실력은 결국 좋은 글에 대한 '감각'을 길러가는 과정이라는 것. 규칙을 외우는 대신, 좋은 문장을 많이 읽고, 내 문장을 의심해보고, 독자의 눈으로 다시 바라보는 훈련. 이 책은 그 훈련을 가장 재미있게 시작하게 해준 안내서였어요.

글쓰기가 두려웠던 분, 업무 메일이나 보고서를 쓸 때마다 막막했던 분, 블로그를 시작했지만 문장이 자꾸 걸렸던 분께 특히 추천해요. 오늘부터라도 책상에 사전 한 권 놓아두고, 조금 더 선명하게 쓰려고 노력해보는 건 어떨까요?

9.5 / 10점 ★★★★★★★★★
한 줄 총평: 규칙이 아니라 '감각'을 키워주는, 과학자가 쓴 가장 재미있는 글쓰기 지침서.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