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 : Steal Like an Artist: 10 Things Nobody Told You About Being Creative
저자 : 오스틴 클레온 (Austin Kleon)
장르 : 자기계발, 에세이

들어가며: 빈 페이지가 두려웠던 나에게


처음 이 책을 손에 든 건 우연이었어요. 한국어판 출판사 소개에 따르면 아마존 밀리언셀러이자 당시 21개국에 번역 출간된 책이었죠. 현재 저자 공식 사이트는 3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된 책이라고 소개하고 있어요. 2013년 국내 초판 이후 2020년에는 여러 크리에이터가 이 책을 인생의 책으로 꼽았다는 점을 강조하는 중앙북스 특별판으로 다시 나왔어요. 제목부터 통통 튀어서 호기심이 이는 순간, 그건 이미 시작이었더라고요.

저는 글을 쓰고 그림을 '조금' 다루기 때문에 빈 페이지의 공포를 잘 알아요. 그런데 이 책의 첫 장은 그 두려움을 뒤집어요. 좋은 아티스트는 베끼고, 위대한 아티스트는 훔친다는 유명한 문장이 이 책의 첫머리를 장식해요. 창작자들의 책이 어떻게 '베끼기'를 권하나 싶었는데, 읽다 보니 그 뜻이 완전히 달라지더라고요. 오늘은 그 '훔치기의 기술'을 하나씩 풀어볼게요.

정직하게 훔치는 힘


이 책은 먼저 '훔치기'와 '카피(흉내)'의 차이를 정리해요. 저자가 말하는 '훔치기'는 남의 결과물을 그대로 복제하거나 출처를 숨기는 표절이 아니에요. 좋아하는 창작자의 작업을 깊이 연구하고, 여러 영향을 섞어 자신의 관점과 방식으로 변형하는 창작의 과정에 가까워요. 책 속에서 가장 먼저 만난 문장이 제 마음에 콕 박혔어요.

"아티스트들은 세상을 어떤 식으로 보는 걸까. 그들은 일단 어떤 대상을 볼 때 훔칠 만한 건지 아닌지 가늠하고 넘어간다." 세상 모든 것이 당신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는 이 문장을 읽고 나니, 창작의 출발점이 '무에서 만들기'가 아니라 '좋은 눈으로 골라내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좋은 걸 훔치면 좋은 결과가, 나쁜 걸 훔치면 나쁜 결과가 따라온다는 이 책의 정직한 톤이 오히려 편안하게 다가왔어요. 내가 아무것도 못 그리는 게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먼저 훔칠지 정하지 못한 게 문제니까요.

영웅처럼 보는 법을 배워라


그렇다면 무엇을 훔칠까요. 이 책의 대답은 놀랍게도 '당신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에요. 그냥 화풍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건드린 작가가 세상을 어떤 눈으로 봤는지를 엿보라는 뜻이에요. 핵심 문장을 참지 못하고 밑줄을 그었어요.

스타일만 훔칠 게 아니라 스타일 너머의 생각들을 훔쳐야 한다. 영웅들처럼 보여서는 안 된다. 영웅들처럼 보아야 한다.



저는 책의 조언을 제 방식으로 적용해, 좋아하는 크리에이터 두세 명의 글을 옆에 두고 문장 구조와 표현을 따라 써 보는 연습을 시작했어요.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고 그냥 시작하라는 충고와 "당신이 써라, 당신이 읽고 싶은 책"이라는 제목이 만나면서, 빈 페이지가 더 이상 두렵지 않더라고요. 완벽한 내 목소리를 만들어 내는 법을 가르쳐 준 게 아니라, 내 목소리와 닮은 사람을 먼저 흉내 내는 걸 허락해 준 게 이 책의 가장 큰 선물이었어요.

두 손이 기억하게 하라


디지털 세대인 저는 모든 걸 메모 앱에 저장하는 사람이었는데, 이 책은 종이의 힘을 줄곧 강조해요. 특히 "무리를 해서라도 꼭 종이를 갖고 다녀라"라는 문장은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가 스케치북이 들어가는 속주머니가 달린 재킷을 맞춤 제작해 입었고, 음악가 아서 러셀이 오선지 넣을 주머니가 두 개 달린 셔츠를 즐겨 입었다는 일화와 함께 머리에 남았어요. 진짜 프로는 펜이든 붓이든, 항상 손에 잡히는 재료와 함께 산다는 거죠.

핵심은 '나만의 도둑질 파일'을 만들라는 거예요. 마음에 드는 문장, 사진, 낙서를 한곳에 모아 두는—말 그대로 내가 훔친 것들의 기록이죠. 스크랩북이 될 수도, 휴대폰 사진첩이 될 수도 있어요. 전 손에 잡히는 종이와 가위와 풀을 준비해 오리고 붙이는 스크랩북을 만들어 봤는데, 모니터에서 멀어진 순간의 감촉이 앨범 속 사진보다 훨씬 잘 기억되더라고요. 손끝으로 만져야 오래 남는다는 이 장의 진심을 체험하게 된 시간이었어요.

곁다리 작업과 생산적 미루기


정신없이 메인 작업만 하던 저에게 충격이었던 조언은 '곁다리 작업이나 취미가 중요하다' 였어요. 재능은 정작 주변 작업, 취미, 산책 중에 숨어 있고, 본업은 그걸 먹고 자란다고요. 저는 글 쓰는 일이 메인이다 보니 '반짝이는 곁다리'가 하나도 없었거든요. 그래서 장마철에 눌러 둔 사진을 편집해 소소한 노트를 만드는 취미를 시작했어요. 특별해 보이진 않지만, 그게 숨 쉴 구멍이 되어 주더라고요.

신기하게도 아무 아이디어도 떠오르지 않을 때는 애써 쥐어짜기보다 잠시 손을 놓는 게 정답이었어요. 작업에서 잠시 떨어져 긴 산책이나 사진 편집 같은 다른 창작 활동을 하다 보면, 오히려 본래 작업으로 돌아갈 집중력을 만들어 주기도 하더라고요. 이 책이 권하는 것은 무책임한 미루기가 아니라 생산적 미루기예요. 한 작업이 막히면 무의미한 시간 보내기로 도망치는 대신, 다른 창작 프로젝트를 진행하다가 다시 돌아오는 방식이죠.

멋진 과정을 보여주는 용기


완성된 작품만 남에게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던 저에게, 이 책은 작업 과정에서 얻은 생각과 작은 결과물도 공유하라고 말해요. 다만 남에게 어떤 가치를 주는 방식으로 꾸준히 내보이는 것을 권해요. 처음에는 내 손재주가 부끄럽더라고요. 그런데 남에게 완벽한 결과만 보여주는 습관이 오히려 창작을 늦춘다는 걸 깨달았어요.

어설픈 낙서 한 장을 공유했을 때 예상보다 많은 분이 응원해 주는 경험을 했어요. 완벽함보다 꾸준한 발표가, 결과물보다 '이렇게 만드는구나' 하는 현장이 사람을 더 끌어당기더라고요. 멋진 작업을 하고 사람들과 공유하라는 6장의 제목이 이제는 용기의 문장으로 다가와요.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나를 내보이는 것, 그것이 바로 2부를 준비하는 힘이 될 거예요.

지리적 한계는 없다


'지리적 한계는 더 이상 없다'는 이 책에서 가장 사이다 같은 내용이었어요. 여행을 많이 다녀본 것도 아니고, 해외 크리에이터와의 교류라고는 상상도 못 해봤거든요. 그런데 이 책은 재미있는 관점을 줘요. 아티스트는 집에서도 여행을 한대요. 인터넷 덕분에 물리적으로 멀리 있는 창작자들의 작업을 만날 수 있지만, 익숙한 환경을 벗어나 사람과 장소를 직접 경험하는 일도 창작의 시야를 넓혀 주죠.

취향은 비슷하지만 문화가 다른 사람들의 작업을 같은 시각에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제게는 창작의 활력소가 됐어요. 방 안에 지도와 포스터를 붙여 두고 작업하는 것, 먼 나라 엽서들을 벽에 걸어 두는 것도 이제는 창작 루틴의 일부예요. 작은 방 안에서도 세계와 연결되어 작업할 수 있다는 감각을 이 장에서 배웠어요.

친절함과 관계의 힘


세상에는 재능이 뛰어난데도 오래 빛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화려하지 않아도 사람들의 마음에 오래 남는 사람이 있어요. 이 책은 창작자의 실력만큼이나 태도와 관계의 중요성을 이야기해요. 8장은 좋은 작업을 만들고 그것을 나눌 곳을 찾는 일,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며 지식을 기록으로 나누는 태도가 창작의 생태계를 넓혀 준다는 메시지를 전해요.

제가 직접 해 본 실천은 '상상의 청중'을 만드는 거였어요. 내 작업을 늘 기다려 주는 딱 한 분이 있다고 상상하고, 그분께 열어 보는 말투로 기록을 시작했죠. 동네 카페에서 우연히 마주친 분께 작은 그림 한 장을 건네면서 시작한 사소한 나눔이 지금은 제 작업의 밑거름이 됐어요. 실력만으로는 흔들릴 때, 태도와 관계가 다시 일으켜 세워 주더라고요.

질릴 만큼 꾸준히


영감이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며칠을 내리 멍하니 보내기 쉽죠. 이 책은 그럼에도 '그날의 할 일'이 있어서 작업을 이어가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해요. '질릴 만큼 꾸준히 하라'는 제목이 그릇된 말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가장 냉정한 작업관리의 지침이에요. 재능은 폭발하고 고이지만, 체력과 습관만이 오래가는 실력을 만든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밤에 몰아서 쓰던 습관을 아침 일정한 시간으로 바꿔 봤어요. 물이 끓듯 시간이 되면 손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쓰다 보니 어느새 완성된 노트가 책상 옆에 쌓이기 시작했어요. 꾸준함은 재능만으로는 만들기 어려운 작업량과 경험을 쌓게 해 주고, 반복되는 지루함을 견디는 태도가 오래가는 작업의 밑천이 된다는 사실이 단단히 남았어요.

크리에이티브는 빼기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은 창작의 본질을 한 단어로 줄여요. 크리에이티브는 '빼기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어도, 아무것도 뺄 줄 모르면 창작은 시작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딱 한 가지 색으로만 그림을 그리는 것, 초기 자본 한 푼 없이 창업하는 것, 예비 부품만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것처럼 '제한'이 오히려 '자유'를 만든다고 말해요. 역설처럼 들리지만 창작자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문장이에요.

직접 해 보니 그 말이 그대로 와 닿았어요. 색을 일곱 개에서 세 개로 줄이자 배색 고민이 사라지고, 문서를 만들 때도 할 말을 빼는 연습을 의식하게 됐어요. 책 마지막 챕터의 문장들, "시도도 안 하면서 핑계만 대지 마라", "당신이 가진 시간과 공간, 재료들만으로 바로 지금 뭐라도 만들 수 있다"라는 말이 가장 인상 깊었어요. 갖지 못한 것에 마음을 쓰는 대신, 손에 든 것 하나로 시작하는 게 진짜 자유인 걸 배웠어요.

마치며: 훔치고, 버리고, 나만의 것으로


이 책은 정답을 주는 책이 아니에요. '어떻게 독창적인 사람이 되나'라는 질문 대신 '이미 흘러온 거대한 창작의 강물에서 오늘은 무엇을 훔칠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해 주는 책이죠. 아쉬운 점을 꼽자면 호크니, 아서 러셀 같은 해외 거장들의 사례가 많아서 나만의 지도를 만들기까지 시간이 걸렸고, 책 한 권으로 모든 창작의 막힘을 푸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정도였어요. 그래도 재출간 특별판의 두께는 가볍고, 읽는 속도는 빠르더라고요.

그래도 추천하고 싶어요. 지금 막 뭔가를 시작하려는 초보 크리에이터, 아이디어가 없다고 자책하던 분, 어른이 되어 센스를 잃어버린 게 아닌가 두려운 분 께 특히 좋은 책이에요. 읽는 데는 반나절이면 충분하고, 담아 두는 데는 한 달이 넘는 시간이 걸릴 거예요. 빈 페이지 앞에서 두려워하지 마세요. 오늘 훔칠 좋은 것 하나만 골라서, 종이에 컵을 잡는 것처럼 작게 시작해 봐요.

9 / 10점 ★★★★★★★★★
한 줄 총평: 남의 것을 베끼는 게 아니라, 세상을 훔치는 눈을 갖게 해준 것만으로도 내 인생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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